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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국가보훈처

나라와 겨레를 열렬히 사랑했던 25세 청년, 매헌 윤봉길 의사

by 이세진 2010. 4. 26.

 

▲ 백범 김구선생 앞에서 선서하는 윤봉길 의사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페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 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각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조락의 시기가 반드시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을 삼는다. 물론 한 두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리는 없다.


따라서, 금회의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의 효과가 없음은 잘 알고 잇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확히 알게하는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 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후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결코 도이(倒爾: 헛된 일)가 반듯이 아님을 믿는다."

 -매헌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한 25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도시락 폭탄'의 매헌 윤봉길 의사였습니다. 사실 윤봉길의사의 의거사실은 온국민이 알고 있지만, 윤봉길의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농촌개혁자 윤봉길

보통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 떠올리면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가 맞습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가 농촌개혁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 농민독본

 

 

윤봉길 의사는 야학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농민독본》을 저술하였습니다.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제1권은 일제시대에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농민독본에는 윤의사의 이상적 진가가 담뿍 담겨있는데요, 일반상식과 농민으로서 갖춰야 할 행실 등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농민독본에 대해 보시려면 : http://www.yunbonggil.or.kr/sub01/sub02_01.html


윤의사는 야학과 독서회의 활성화에도 힘을 썼습니다. 학문을 갈고닦고 책을 가까이하고 토론을 하면서 산지식을 쌓자고 주장했는데요. 국민 스스로가 똑똑해져야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의사는 1928년에 부흥원을 세워 농촌자립을 위한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였고, 1929년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위친계와 수암체육회 등도 운영하였습니다.

  

조선의 청년 남녀여!

우리의 임무는 크고 우리의 책임은 무겁다.

전날의 예가 없는 중대한 사명이 우리 어깨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 사명은 오인(吾人)이 말 아니하여도 그대들은 다 잘 아는 것 아닌가?

그대들은 이것을 회피하려는가? 대담히 수긍하려는가?

 

소년아,

더욱이 조선의 소년아!

야망을 가져라. 

-야학과 독서회의 부흥에 힘썼던 윤의사

 

 

 

 

 

역사적 의거의 현장

윤의사는 역사적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한 후 물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택시를 타고 홍구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홍구공원 안은 상해거주 일본인이 1만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명, 그밖에 각국 사절, 각계 초청자 등 합하면 2만이 넘는 인파가 회집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식단 뒷면에는 기마 헌병이 단 밑으로 단상을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병력이 이중 삼중으로 삼엄하게 경계하고 그 뒤에 일반군중이 회집해 있었습니다.

 

 

▲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와 윤의사

 


윤봉길 의사는 미리 작정했던 후편 오른쪽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습니다. 오전 11시 20분경 그들 축하식의 제 1차 순서인 관병식을 끝내고 이어 제 2차 순서인 축하식순으로 들어가 일본국가가 제창되어 거의 끝날 무렵이였습니다.


드디어 역사적인 11시 50분경, 윤의사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걸메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외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17미터내외 떨어진 중앙 단상 위로 힘껏 투척하였습니다. 그 폭탄이 그대로 노무라와 시게미쓰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천주응징장으로 변하였습니다.


결국 상해침략의 원흉인 총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는 전신에 24개처의 탄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고, 해군총사령관인 제 3함대 사령관인 해군중장 노무라는 실명하였고, 제 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하였습니다. 또 주중공사 시게미쓰도 다리가 부러져 절뚝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습니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와 민단간부 토모노도 각기 부상하며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의탄을 맞았습니다.

 

 

 

그는 왜 도시락폭탄을 던졌을까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는 왜 도시락폭탄을 던져야만 했을까요. 윤의사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상해의거를 실행에 옮겼던 이유는 조국(조선)의 독립을 위해서였습니다. 의거를 통해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세계에 알려 하루빨리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죠.

 

윤의사의 상해의거는 여러모로 많은 의의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일본 침략군 사령부에게 타격을 입히는 성과를 냈습니다. 중국군 총사령관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 대병도 불가능한 거사를 한국용사가 단행하였다"고 윤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였다고 합니다.

 

 

1932년 4월29일 의거 1시간전에 윤의사가 백범 김구선생에게 드렸던 시계

 

 

상해의거 당시 일본군은 상해를 점령한 상황이였습니다. 국제도시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에게 한 청년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은 전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는 한국 민족의 불굴의 독립정신과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큰 성과를 내었습니다.

 

또한 윤의사의 의열투쟁의 성공은 만보산 사건으로 붕괴된 한 중 양 민족의 연대를 다시 회복케 하고 강화하여, 중국에서의 한국 민족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여건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한국 민족의 독립정신을 더욱 크게 일깨워주었다는 점 역시 상해의거의 큰 의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라와 겨레를 열렬히 사랑했떤 25세의 청년, 매헌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억합니다.

 

 

 

※자료출처 : http://www.yunbong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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