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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국가보훈처

사진으로 보는 경술국치 100년

by 이세진 2010. 7. 27.

얘들아, 100년 전 우리나라 이야기를 들어볼래?

(2) 사진으로 보는 경술국치 100년

 

지난번 경술국치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포스팅에 이어서 오늘은 사진으로 보는 경술국치 100년에 대해 포스팅을 해볼까 합니다.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마음에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진'과 같은 자료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은 2010년 지금, 사진을 통해 경술국치 당시의 모습을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얘들아, 100년 전 우리나라 이야기를 들어볼래?> 원문 다운로드 받기 : http://kids.mpva.go.kr/data/data06.asp

 

 

 

일장기가 걸린 경복궁 근정전

조선시대 왕들이 나랏일을 보던 경복궁 근정전에 가보신적이 있나요?

아래 사진 속 근정전은 분명히 우리나라 궁궐 경복궁의 모습인데 이상하게 일본 국기인 일장기가 걸려 있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0년 8월 대한 제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근정전은 조선 시대에 왕이 백성들을 위해 나랏일을 하려고 세운 건물입니다.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린 것은 이제는 나랏일을 일본이 빼앗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요? 후세의 우리는 국가의 치욕인 이 날을 잊지 않기 위해 ‘경술국치’라고 부릅니다.

 

 

외세의 경쟁터가 된 한반도

1864년 고종이 조선의 임금이 되었을 때에는 힘센 나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나라들을 침략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본은 1875년 ‘운요호’라는 일본 군함으로 강화도를 침략하였죠.

 

조선은 이 때문에 처음으로 일본과 1876년 강화도에서 불평등한 내용이 담긴 조약을 맺게됩니다. 그 후 미국, 영국 등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 조약들은 평등한 조약과는 거리가 멀어 한반도는 외국 세력의 이권을 둘러싼 경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청나라와 새롭게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속내를 가지고 있던 일본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1894년에 안으로는 나라를 바르게 세우고 백성을 위해, 밖으로는 서양과 일본을 몰아내고자 하는 동학농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이를 핑계로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1894년 청일전쟁).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조선의 모든 백성은 분노하였고,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까지 쳐들어와 왕비를 살해하였고(1895년 을미사변), 개화파가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조선의 백성들은 왕이 궁궐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나라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1896년).

 

이에 고종은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하여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1897년). 황제 즉위는 우리나라가 근대 국가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지만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고 상공업 활동과 정부 조직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고종 황제와 신하들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황제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독립협회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고, 독립신문 또한 폐간당했습니다(1899년). 대한 제국은 권력을 황제로 집중해 개혁을 주도했지만 외세의 침략에 휘둘리게 되었습니다.

 

 

 

 

 

이천만 국민의 노예가 되다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노리던 일본은 먼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켰고 승리하였습니다(1904년 러일전쟁). 일본은 조선 침략 계획대로 군대를 조선에 마음대로 파견할 수 있는 협약을 강제로 맺고(1904년 한일 의정서), 미국과 비밀협정(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영국과는 동맹(1905년 제2차 영일동맹)을 맺은 결과 한국에서 일본의 힘은 커져만 갔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는 경운궁을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몇 겹으로 둘러싸게 한 후 우리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1905년 을사늑약). 제2차 한일협약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을사늑약에 의해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 왕이 임명한 통감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울분에 찼습니다. 《황성신문》은 주필인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실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만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멈추겠는가?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로 끝을 맺으며, 을사조약을 맺은 정부 대신들을 도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조약을 맺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이 다섯 명을 을사5적이라고 부르며 매국노라 하였습니다.

 

매국노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한 제국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대표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를 문제 삼아 일본은 고종 황제를 내몰고 그의 아들 순종을 황제에 올렸습니다. 또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일본인을 정부의 관리로 앉히는 조약을 강제로 맺었습니다(1907년 정미7조약) 이제 한국은 일본의 침략에 의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사람들

외세의 침략이 거세진 만큼 민중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한국이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필요했던 각종 자원과 철도 부설권 등을 일본과 미국, 러시아 등에 강제로 뺏기고 말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울분과 함께 백성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명성 황후가 궁궐에서 살해당했던 을미사변 뒤 일어났던 의병 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더욱 거세졌습니다. 먼저 최익현 같은 이름난 유학자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뭉쳐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또 태백산 호랑이로 유명한 신돌석은 평민 출신으로 의병을 이끌었습니다. 1907년 8월 1일 통감부의 지시로 약 2만여 명의 대한 제국 군대는 해산당하였습니다. 박승환 참령은 이에 항의하고자 권총으로 자결하였고, 우리 군대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뿔뿔이 흩어지게 된 군인들은 곧 항일 의병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힘을 얻은 전국의 의병들은 13도 창의군이라는 이름 아래 서울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힘을 잃게 된 전국의 의병들은 각 지역으로 후퇴하고 맙니다(1908년 2월). 그해 11월 신돌석 의병장마저 믿었던 옛 부하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다른 의병들 또한 일본군의 탄압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또 다른 항일 운동을 위해 나라 밖으로 투쟁 무대를 옮기게 됩니다. 이처럼 의병들은 의로운 마음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걸고 일본에 대항했습니다.

 


한편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안중근은 한국을 침략하는 데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안중근은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총으로 쏘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재판을 받는 중에도 대한 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전쟁에 참여한 것이며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의거를 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일본에서는 ‘테러’라고 주장했지만 전 세계 식민지 민중들에게 자주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의거’였습니다.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노력은 또 있었습니다. 사람을 기르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사람의 힘을 모으기 위해 애국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또 일본에 진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온 국민이 품삯을 모으고, 반지와 비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일병합' 조약 발표, 경술국치

대한 제국의 외교권, 사법권을 차례로 빼앗고, 군대마저 해산시킨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더 슬픈 일은 이러한 일본에 맞장구를 치며 한국과 일본이 ‘합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한국에 총독부를 세우고 데라우치를 총독으로 보냈습니다(1910년). 데라우치는 한국의 경찰도 해산시키고, 일본 헌병이 한국을 감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대한 제국 병합에관한 조약’이라는 문서를 내밀었어요. 그 문서의 첫머리에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치욕적인 문서에 순종 황제의 옥새를 찍어 오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미 ‘한일합방’을 주장했던 친일파 이완용은 순종 황제에게 이를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순종 황제가 이를 끝내 거부하자 총리대신 이완용이 황제를 대신한다는 위임장을 강제로 받아 ‘한일 병합’ 조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1910년 8월 22일). 일본의 데라우치가 ‘한일 병합’ 조약을 발표한 날(1910년 8월 29일) 이제 한국은 사라져 버리고 그저 일본의 한 지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이라는 뜻에서 ‘국치일’, 경술년에 당한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라고 부르며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지 100년이 흐른 지금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바로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모여 ‘한일 병합’은 대한 제국의 황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른 불법 행위이며, 모든 조약의 전문과 본문도 거짓이라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고 또 100년이나 흘러서야 발표된 선언이지만 한·일 간의 공동 선언은 참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요?
바로 우리 역사에 대해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일본의 식민 통치는 정당하지 못한 것이고, 그 기간 동안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수없이 잔혹한 일들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우리가 미래에 국제 사회의 주역이 되었을 때, 평화를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는 국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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